나는 엄마라는 삶이 참 좋다. 나처럼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"누군가의 엄마, 아내, 딸"같은 타이틀은 나를 숨기기에 더없이 완벽한 외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. 그 그늘 아래 숨어 지내는 것이 내심 편안했다.
하지만 그 평온한 바람막이 속에서도 마음이 요동치는 순간들이 있다. 아침마다 학교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깨울 때면
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먼저 앞선다. 초등학교 고학년에 되어가는데 간단한 받아쓰기조차 어려워하는
아이에게 겨우 문장 두 개를 써보라고 할때도 안쓰러움은 계속된다. 하기 싫은 마음에 울음을 터뜨리면, 마음이 약해지지만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마냥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속이 타들어 간다.
식사 시간은 또 어떻고, 제때 먹지 않아 억지로 먹이는 게 싫어서 한발 물러나면, 꼭 설거지를 다 끝낸 뒤에야 배가 고프다고 한다.
귀찮음이 먼저 오지만, 또 아이 굶기는 엄마는 될 수 없으니 잔소리 한 두 마디 전하며 또 앞치마를 걸친다.
화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이고 마는 내 모습에 자책감이 든다. 포용적인 부모가 아이를 망치는 말이 가시처럼 가슴에 박히지만, 모질게 마음먹는 게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숙제다.
그러다 문득, 결혼 전 젊은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. 그때의 나는 오직 나 밖에 몰랐다. 한 달에 50~60만 원은 족히 품위유지비로 쓰며, 마치 내일은 없는 것처럼 오늘만 보고, "난 오늘 하루를 아주 열심히 살 거야!"라는 말로 포장하면서..
누군가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'엄마'라는 단어는 나에게 절대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고 생각했다.
하지만 지금의 나는 하이힐 대신 장화를 신고 농사짓는, 가끔은 부업도 하는 평범하고 바 주부로 살고 있다. 한때 화려했던 나의 화장대 위에는 시어머니께 얻은 샘플들이 무심하게 놓여있다. 갓난 아이때 아이들을 키우며 얼굴에 무언가를 바르면 아기에게 좋지 않을까 봐 끊었던 화장이 이젠 습관이 되기도 했고 나이가 드니 이젠 그것도 귀찮아진 삶이 이제는 편안함이라는 이름으로 적응되어 버렸다.
또.. 굳이 예쁘게 단장하고 갈 곳도, 그럴 마음의 여유도 경제적 여유도 없는 일상이 당연해졌다.
그런데 가끔 그 화려했던 시절의 내가 문득 얼굴을 내밀 때면 걷잡을 수 없는 서러움이 복받쳐 오른다.
다시 말하지만 나에게 품위유지비를 못써서가 아니라 나만 생각하던 내가 소중했던 내가 없어진게 서럽다는 이야기다.
그런 서러움이 복받쳐도 여전히 아이들을 나 자신보다 사랑하고 소중함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사랑의 무게에 눌려
정작 내가 뒤로 미뤄진게 나 자신에게 미안해서 가끔 아이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외치듯 말한다.
"야! 나도 소중해~ ! 나도 추워! 나도 엄마도 너희 만큼 나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야!"
그럼 아이들은 "저 엄마 또 왜 저래~?"라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바라본다.
아이들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나를 사랑하는 마음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, 나는 오늘도 나를 다독인다.
나를 드러내기 싫어서 누구 엄마가 좋은 나 조차도 결국 '나'로서 존재하고 싶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기로 한다.
